하서 김인후 선생 이야기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와 문장(文章)을 모두 갖춘 이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이자 문신, 문인입니다. 본관은 울산으로 전남 장성군에서 태어났고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입니다.

조광조의 숙부인 조원기가 전라감사로 재직할 때 여덟 살이 된 하서를 신동이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뛰어난 자품을 타고났으며, 관직에 오른 후에는 여러 벼슬을 역임하며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중책을 맡아 인종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종 승하 후에는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해 조정의 거듭된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는 '문정(文正)'의 시호를 하사받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영원히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락하는 ‘불천위(不遷位)’의 영예를 받았습니다. 또, 공자를 비롯해 뛰어난 학자들의 신위를 모신 문묘에 배향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8명의 현인으로 꼽히게 됐으며 장성의 필암서원, 남원의 노봉서원, 옥과의 영귀서원에서도 하서의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특히 필암서원은 매년 4월과 9월에 춘향제(春享祭)와 추향제(秋享祭)를 성대히 열어 선생을 기리고 있습니다.

정조는 ‘하서는 동방의 주자(朱子)이며, 조선 개국 이래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와 문장(文章)을 모두 갖춘 이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하서를 극찬했습니다. 하서의 학문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시문에도 능해 많은 시가를 남겼습니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 등과 10여 권의 시문집이 있습니다.

하서 선생 연표

1560~1550

  • 1560

    정월 16일 별세. 을사사화 후 관직을 쓰지 말라 유언함

  • 1559

    일재 이황과 ‘태극, 음양 일물설'을 논변함

  • 1558

    고봉 기대승과 ‘태극도설' 강론함

  • 1557

    주역관상편과 서명사천도 등을 지음(소실함)

  • 1556

    화담 서경덕의 ‘독주역시’를 비판함

  • 1555

    대맥동에 새로 집을 지음

    필암서원 확연루
  • 1554

    전라관찰사를 통해 명종이 하사한 음식을 거절함

  • 1551

    모친상을 당함

  • 1550

    고향 대맥동으로 돌아옴. 일기 쓰기 중단

1549~1540

  • 1549

    <대학강의발> 지음.

    순창 남산 후리로 옮김.

    부친상 당함.

    백화정
  • 1548

    어버이 모시고 순창 점암촌에 우거함

  • 1545

    중국 사신 접대 제술관 뽑혀 상경함.

    인종 시약 자청하였으나 허사, 옥과로 돌아옴.

    인종 승하함. 벼슬 버리고 귀가.

    을사사화로 많은 동지 잃음.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도 불응함.

  • 1543

    모재 김안국 작고. 상복 입음

    홍문관 박사, 시강원 설서.

    인종(세자) 사랑받으며 묵죽도와 주자대전을 받음.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으로서 경연석상에서 기묘명현의 신원을 청하는 차자 올림

  • 1542

    홍문관 저작이 됨

  • 1540

    사가독서. 이황 등 12명이 옥당에서 계를 맺음

  • 1540

    문과 급제

1539~1510

  • 1539

    벼슬 없는 포의(布衣)로 제술관에 뽑혀 중국 사신을 접대함

  • 1536

    성균관 복귀. 스승 최산두 작고. 가마함

  • 1535

    일시 귀향

  • 1533

    성균관에서 이황과 공부함

    성균관 명륜당
  • 1531

    진사가 됨. 성운, 서경덕, 백인걸, 정유길 등과 동방

  • 1528

    성균관에서 ‘칠석부’ 장원하여 이름을 떨침

  • 1527

    최산두를 찾아 공부함

  • 1525

    일록(일기)를 쓰기 시작함

  • 1523

    여흥 윤씨와 결혼함

  • 1522

    <시경>공부 몰두, 1000번 읽음

  • 1519

    전라관찰사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움

  • 1518

    교리 기준이 아뢰어 임금님이 붓 하사함

  • 1517

    전라관찰사 조원기가 전주로 불러 재주를 시험함

  • 1515

    시 상원석(정월 보름) 지음. 신동으로 이름남

    맥동마을
  • 1510

    음력 7월 19일 장성 서쪽 대맥동에서 태어남

하서 선생의 학문과 사상

선생은 중국 송나라 정주학과 우리나라 포은 정몽주, 정암 조광조로부터 내려온 학통을 이어받은 도학자이다.
유교의 경전들을 평생 동안 연구하여 실천적 도학을 추구하였다.

저술 활동
우주관, 인성관, 수양론, 경세론, 의리론이 집약되어 있는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천명도>등을 저술하였다. 현재는 <천명도>만 남았다.
학술 연구
조선시대 도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선생의 깊고 오묘한 학설은 태극음양론, 사단칠정론, 인심도심설, 천명사상,
중화사상 등이다. 선생은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 예학에도 밝았다.
국문학 기역
  • - 선생은 국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국문학의 새 장을 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 선생의 국문 시조는 자연가, 도임사수원사가, 백구가 등 3수가 전해오고 있다.
  • - 선생이 저작한 <백련초해>는 고대의 명시 100수를 모아 국문으로 음을 달고 해설하여 쓴 것이다.
  • - 475개의 근대 국어 어휘, 고어사전류에도 없는 어휘 21개, 희귀한 어휘 19개가 나타나 있어 국어 어문학적인 면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백년초해>는 1610년(광해 2년) 판각하여 필암서원에 보관하고 있다.
사상
  • - 선생의 사상은 도학을 바탕으로 하여 수양론, 경세론, 의리론을 들 수 있는데 주경, 궁리, 역행을 강조하였다.
    안으로는 경(敬)으로써 올바른 마음을 갖고 밖으로는 의(義)로써 올바른 행동을 하여
    마음과 몸이 일치하는 인격의 성숙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 - 선생은 내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정신을 근본삼아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임금이 덕을 쌓고,
    어진 신하를 등용하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고, 소학과 삼강을 가르치는 데 힘써야 하며,
    언로를 넓히고 바르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 또한 도학에 근본 하여 백성이 편안하고 근심이 없으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정치를 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민본위민의 경세정치를 실현하여야 한다고 중종 왕에게 상소하고 강론하였다.
  • - 선생은 도학을 학문 연구로 끝내지 않고 충의와 의리로써 몸소 실천하였다.

선생에 대한 평가

하서는 맑은 물에 핀 연꽃이며
화창한 바람과 비 갠 후의 밝은 달과 같고
나아가고 물러남(신중한 처세)은
우리나라에 비할 사람이 없다 - 송강 정철 선생 -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하나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 뿐이다 - 정조대왕 -

학문적으로 교유할 사람은 하서 뿐이며
도학 절의는 비교할 사람이 없다 - 퇴계 이황 선생 -

하서 선생 유물

하서 선생의 천명도(天命圖)

천명도 (天命圖) 란 우주만물의 성정을 표현한 그림이다.

하서 선생이 1549년 그린 천명도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현세 치증적인 우리나라
전통사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인간은 사단칠정의 원칙에 따라 선한 사고와 행동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늘은 둥글게 표시하고, 땅은 흙색으로 네모지게 표시하였다.

하늘은 음양의 조화를 나타냈다. 천명은 남쪽을 향해 왼쪽부터 춘하추동과
동서남북을 따라 자연의 순환인 원형이정(元亨利貞)을 하늘의 도인 성(誠)이
감싸고 있다.

오행과 12간지로 방향과 시간을 나타냈다. 인간은 둥근 머리와 다리는 네모난
모습으로 도식화하였다. 또 인간의 다섯 가지 성품을 음양과 연결하여 이 성품이
두루 사방으로 통함을 나타냈다.

천일합일의 근거로써 찾고 있는 중용의 이념을 심성론에 적용시킨 하서 선생의
천명도는 천명이 인간의 심성이며, 중화(中和)로써 천명과 조화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한 마디로 천명도에는 하서 선생의 도학사상이 총 집약되어 있다고 하겠다.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
(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

1542년 3월 ~7월 경 사미시에 함께 급제한 동기생들이 십수 년을 전후하여
대과에 급제한 모임을 갖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김인후 선생을 비롯, 정유길, 민기, 남응운, 이택, 이추,
운욕 등 7명이다.

이 그림에는 당시 홍문관 정자 벼슬이었던 하서 선생이 쓴 칠언율시가 있으며,
말미에 그의 자인 후지(厚之)를 썼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03*61cm

인종대왕 묵죽도

하서는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다.

세자는 직접 그린 묵죽도를 김인후에게 하사하였고, 김인후는 묵죽도에
군신의 예를 시로 표현했다.

이 시는 절의를 상징하는 대나무와 영원히 변하지 않은 바위의 조화를 그린
세자의 뜻처럼, 김인후도 세자에게 군신의 절의를 지키며 충성을 다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림은 묵죽도의 목판본으로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97.5*62.3cm

하서 선생 위패

정조 대왕은 하서 김인후선생을 문묘에 배향하도록 하고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하나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다” 라고 극찬하셨다.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하서 선생은 현재
필암서원의 우동사에 모셔져 있다.